판화 -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인간이 같은 인간을 사물화하고 심지어 절멸시키고자 했었던 수용소 체험에 대해 증언하며 레비는 잊지말아달라고 애원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인종청소나 수용소는 계속해서 생겨나고 발생하고 있으며, 홀로코스트의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하나였던 유대인이 이젠 가해자가 되어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 총 14권의 소설, 시집, 평론 등을 발표하며 대표적인 이탈리아의 작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해방된 지 40년이 지난 87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아래 길게 발췌한 글은 이 책의 뒷면에 마련된 '독자들에게 답한다'의 일부분이다.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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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유대인에 대한 나치스의 광적인 증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략>
역사적 현상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돌려(끔찍한 명령을 실행에 옮긴 자들도 결코 무죄일 수 없다!) 설명한다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한 개인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해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가정들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을 변명하며 죄의 양이 아니라 질을 설명한다.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브롬,슈람,브라허)의 겸손함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해동을 ‘이해한다’는 것은(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정상적인 인간 중에서 히틀러, 힘러, 괴벨스, 아이히만 등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지만 안도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이는 안타깝게도 행동으로 옮겨졌다)이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하니까. 사실, 그것들은 인간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다. 역사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고, 생존을 위한 가장 잔인한 생물학적 투쟁과도 비교가 어려운 것이다. 전쟁을 이러한 투쟁과 연결짓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전쟁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전쟁의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다. 전쟁은 항상 끔찍한 사건이다. 유감스러운 사건이지만 우리의 내부에 포함되어 있다. 전쟁은 이유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나치즘의 증오 속에는 이유가 없다. 그 증오는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밖에 있다. 파시즘이라는 유해한 나무에 열린 유독한 열매지만, 파시즘 밖에 그것을 뛰어넘은 곳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 하며 경계해야만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의식이 또다시 유혹을 당해 명료한 상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까지도.
이 때문에 벌어진 일에 대해 숙고하는 건 우리 모두의 임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공개적으로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이 그들을 믿었고 박수갈채를 보냈고 감탄했으며 신처럼 경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자신들이 한 말의 신뢰성이나 정의로움을 앞세우지 않고 장황한 말로, 연극배우 같은 방법으로 , 본능적으로 혹은 끈기 있는 훈련과 습득을 통해 암시적으로 말을 했으며 사람을 홀리는 비밀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들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대개 비정상적이거나 어리석거나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환영을 받았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수백만의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
이는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엔 너무 단순한 공식임이 틀림없다. 불관용, 압제, 예속성 등을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파시즘이 이 나라 밖에서 탄생되어 살금살금, 다른 이름을 달고 이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혹은 내부에서 서서히 자라나 모든 방어장치들을 파괴해버릴 정도로 난폭하게 변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혜로운 충고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저항할 힘을 찾아야 한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유럽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이 힘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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