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이창동 | 1 ARTICLE FOUND

  1. 2007/06/11 난 해피엔딩을 믿지 않아요.

-이른바 해피엔딩인가요?
=아니. 난 해피엔딩을 믿지 않아요. 해피엔딩은 존재하지 않는 말 같아요. 엔딩이 어딨어? 나는 이야기는 끝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관객/독자에게 하나의 구조로 다가가지만, 현실은 아니죠.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라고 현실이 해피엔딩이 되는 건 아니라고. 영화가 수면에 일렁이는 잔물결만한 영향이라도 관객에게 미치려면, 영화를 본 관객이 “그래, 두 사람 행복하게 살게 됐네, 축하한다!” 툭툭 털어버리고 극장을 나서서 자기 나름대로 걸어가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나는, 그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으셨던 걸로 압니다. 단편소설 <불과 먼지>에 어렴풋이 묘사가 돼 있기도 합니다. 여쭙기 조심스럽지만, 그 일이 창작자로서의 길에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나요?
=작가로서는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런 경험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거의 모든 면에서 달라져요. 가슴에 묻는다는 건 그냥 수사가 아니라서 가슴의 통증이 1년 남짓 계속됐어요. 가끔 사람들이 위로를 하면 그 말도 듣기 싫거니와 그 사람이 굉장히 미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수술로 아이를 잃은 학부형이 와서 “선생님, 우리가 어쩌다가 한배를 탔네요” 하더라고. 그 말은 완전한 공감이 됐어요. 굳이 말하면 그 배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타는 배겠죠. 그 소설을 썼을 때는 뭔가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흔적이 없다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거든. 사람의 죽음에는 남이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5·18의 죽음이 그렇죠.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놀랍지 않아요? 나는 놀라웠어요. 인간의 삶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기도와 찬송, 간구의 목소리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리적으로 그 소리를 꺼려하면서도 구원을 바라는 마음에 대한 공감이 느껴집니다.
=세상엔 그 고통을 아는 자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고통이 있어요. 즉, 인간의 논리로는 위로받지 못하는 부분이 인간의 삶에 있다는 거죠. 어떤 삶은 인간의 논리로 기억도 되고 기념도 되고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싸우기도 하죠. 그러나 어떤 삶은 인간의 논리로 전혀 기억되지 않고 사라져버려요. 따라서 초월적인 것을 인간이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것도 결국은 다시 인간의 언어로 만들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요컨대 인간의 문제인 거죠. 내 영화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감독님 작품들이 지닌 또 하나의 공통점은 불운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입니다. 불행과 불운은 좀 다를 텐데요.
=다르죠. 행복감은 학습되는 거예요. 나는 행복에 대해 학습이 안 돼 있어요. 한국인이 대개 행복을 학습 못하고 살아가죠. 여론조사를 하면 OECD 국가 중 불행지수가 제일 높잖아요. 서양인들은 밥 먹고 나서도 “Are you happy?”를 물을 만큼 행복이란 말을 친숙하게 쓰지만 우리에게 행복은 내가 쉽게 손잡을 수 없는 무엇이지요.


-예전에 누가 촬영현장 모니터 보면서 “이 장면 관객 얼마짜리다” 칭찬하면, 철렁해서 거꾸로 “이건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죠. 지금까지 감독님이 세상에 내놓은 소설과 영화가 아주 많은 상을 탔잖아요. 훈장도 받으셨고요. 상을 그만큼 많이 받으니 오히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정말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내가 부르짖고 이루고자 노력하는 정직함이 어디까지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죠. 어려서 백일장을 나가다보면 어떻게 쓰면 상을 주는지 알아차렸거든요. 그처럼 내가 생각하는 정직함에 이미 타인의 시선이 들어 있지 않은가 하는 석연치 않음이 있죠.


질문 - 김혜리 기자

답 - 이창동 감독

원문보기 : 끈질긴 이야기꾼의 도돌이표, 영화감독 이창동



허문영: 유괴범의 면회실 장면 뒤론 그 이후에 대해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창동: 그렇다. 중요하지 않으니까. 사실 영화에서 유괴가 중심이 아니다. 중요한 건 고통이다. 그 고통이 무슨 사건에서 비롯된 고통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또 나는 고통이란 자기가 경험하는 것까지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인간관계의 모순이다. 그리고 어떤 고통의 경우에는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있다. 인간의 논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거다. 이 영화에서 신애가 당한 고통이 그런 고통이지. 그때는 가해자 자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미워해봐야, 다시 말해 인간의 논리로 미워해봐야 고통만 깊어질 뿐이라고. 거기서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고통을 치유받든지, 어쨌건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야만 한다.


 

허문영: 이창동 영화의 주제는 변함없이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왜 영화라는 매체로 고통이라는 주제를 다루나.


이창동: 그 질문을 약간 바꿔 답하자면, 내가 느끼기에 즐거움을 다루는 것보다는 고통을 다루는 게 좀 정직하달까. 그런 저항감도 있다. 나는 이른바 시네필도 아니다. 무작정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하게 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영화만 하면 다냐, 이런 생각도 있다. 정말 욕 들을 소리지만 영화가 그렇게 윤리적인 매체는 아닌 것 같다. 그 말이 싫다면 착한 매체는 아닌 것 같다. 그 말도 싫다면 영양가 있는 매체는 아닌 것 같다. 흔히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영화도 마음의 양식인가? 아닌 것 같다. 이를테면 폭력을 다루는데, 폭력을 새롭게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왜 영화 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상찬을 하는지 모르겠다. 영화가 관객의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남의 몫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 윤리적으로 보기에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다. 그게 상식이다. 영화는 그 상식이 작동 안 된다. 나는 여전히 그게 의심스럽다. 시네필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난 내가 고민하는 만큼 영화에서 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관객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니면 그냥 소비되고 마는 것인지.


원문보기 :

        이창동의 <밀양> ② 이창동 감독, 영화평론가 허문영 대담


원문 : 2007.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