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5센티미터>를 두번째 보다.

 영화를 두번이나 보면서 머리 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막상 활자가 되어 나오지를 않는다. 이것도 병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난 이 영화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짧게 평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 그 설레임과 두려움에 대한 감정, 좋아하기에 상처받고 좋아하기에 상처주고, 그 뒤에 남는 그리움과 미련 그리고 쓸쓸함에 관한 이야기.

 처음 사랑에서 '영원'을 느꼈다던 주인공은 결국 그 영원 때문에 다음 사랑에서 만족을 못 느꼈는지 모른다. 남자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이야기는 여자 역시 '영원'의 감정을 느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항상 상호적이지만은 않은 법이니까...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내 머리 속을 맴도는 잔상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이 영화를 두번째 본 시점에서 느낀 점은 앞서 느꼈던 그 좋아한다는 감정이 실은 '인연'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전적으로 요즘 읽고있는 <장정일의 독서일기 7>에서 장정일이 인용한 '피천득'선생의 "인연"에 대한 글 때문이다.

 저자(피천득)는 표제작이 된 작품(인연因緣)에서 '마음에 그리움이 남아있는 상태'를 인연이라고 규정하는 듯하다.
                                                      <중략>
 아사코를 사랑했던 피천득 선생이나 중국 유학생을 사랑했던 주요섭의 예에서 보듯이. 인연은 혼자 만들 수 없다. '나와 너의 만남'이 모든 인연의 시작이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비극적인 인연은, 인연의 불가능 속에서 홀로 된 자신과 대면한다. 너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씨앗이 되고, 불가능성이 거름이 되어, 이윽고 너와 나를 다시 태어날 내생來生의 환희 속으로 밀어내는게 인연이다. 아예 연을 맺지 말라는 불가의 가르침도 있지만, 인연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한편, 또 다른 약속으로 이끈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7> p 231~232 中

 '사랑'을 '인연'으로 그리고 그 '인연'을 '마음에 그리움이 남아있는 상태'로 이해하면 영화 속 남자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그 미소 또한 이해할 수 있게된다. 그는 위의 글에서 장정일이 말한 바와 같이 그제서야 홀로 된 자신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다른 인연을 맺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그의 삶 속에서 쓸쓸함이 좀 다른 의미가 되었을거라고 ,그리고 그 결론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음에 그리움이 남아있는 상태' 정말 명료한 정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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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

Agi's Theater 2007/08/2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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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드라마를 보다.
만약 좀 더 일찍 봤더라면 무언가가 변했을까?

요즘 들어 가끔씩 느껴지는 생각은 드라마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상황들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는 것.
어느덧 우리들은 나이를 먹었고, 연애를 하고 이별도 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결혼하고 간혹 헤어지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있다.

왜 많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서야 더 잘 이해되고, 미안해지고, 설명할 수 있게되는 걸까?
그 때 우린 무엇을 아껴두고 무엇을 감춰두었던 걸까?
왜 그 때 좀 더 솔직하지 못했을까?
진심이라는 거. 그 진심의 전달이 왜 그렇게 힘든 거였을까?
아니면 그 방법조차 몰랐던 걸까?
만약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이번엔 실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드라마를 보는 내내 풀리지 않는 질문들과 기억의 잔상에서 헤매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기억의 연장 속에서 어쩌면 무의미한 질문들을 내게 계속 던져본다.

드라마 속 말마따나 진심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객관적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그리하여 돌아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 지라도 ..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애달파 하면서
무엇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고통으로 채워진 시간도 지나고
죄책감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시간도 지나고
희귀한 행복의 시간도 지나고
기억되지 않는 수많은 시간을 지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한 미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루해 하기도 하고 ,
자주 상대를 불쌍히 여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또 지나 돌아보면..
이 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 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연애시대 16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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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광주란 이름은 특별한 울림을 주는 말이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3 시절 <모래시계>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광주는 내게 국가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모순투성이의 한국사회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키워드였다.

 어떻게 한 국가의 군인이 자국의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살육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내게 던져주었으며, 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여순사건‘4.3항쟁을 그리고 ‘80년대‘6월 항쟁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난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에 대해 인식하게 외었고 그러한 거대담론에 대해 경계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광주란 이름 ‘5이란 말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어떤 감정의 이유다.

 서론이 길었던 것은 지금부터 내가 하게 될 <화려한 휴가>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소위 말하는 객관성과는 떨어진 이야기일 수 있음을 밝혀두고 내가 느낀 생각들의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화려한 휴가>를 같이 본 사람들은 이 영화가 재미없고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3명이서 본 영화를 그 중 2명이 별로라고 했으니 객관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별로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재미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비극으로 끝난 사건을 다룬 작품에 대해 재미라는 단어가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작품이 재미있다 할지라도, ‘재미란 단어를 써선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표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 난 좋은 영화라는 표현을 쓰며, 내게 있어 이 영화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좋은 영화라고 판단한다.

 

 <화려한 휴가>광주를 다룬 상업영화로는 3번째 영화라고 한다. 그 이전으로는 <꽃잎> <박하사탕>이 있었다. <꽃임>은 보지 않았으니 논외로 하고 그 이전에 나온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시점과 시대일 것이다.

 

 <박하사탕>은 광주의 사건 이후 20년 뒤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현대의 한 남자가 순수성을 잃고 파멸하게 된 계기를 20년 전 광주에서 찾는다. 광주에 계엄군으로 동원된 군인이었던 남자가 가지게 된 죄책감이 그를 포악한 사람으로 만든 결정적 이유라고 말한다. <박하사탕>의 그 남자는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알레고리다. 현대 한국의 포악함을 광주의 상처에서 찾았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후일담이며 가해자의 시선에서 본 죄책감일 뿐이다.

 

 반면 <화려한 휴가>는 그 광주의 5월의 시간들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으며, 그 시간을 살고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피해자의 시점에서 그 당시를 조망하는 영화인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군인들이 자신의 아들,,부모,동생,친지들을 잡아가두고 패고 죽이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 때 그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이 영화는 그에 대해 어떤 결론을 제시하거나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라는 언명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다.(만약 이 말이 주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과는 따로 논의를 하기로 하자.) 이 영화는 그 때 그 곳 그 사람들의 행동과 시간을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며, 그게 내가 이 영화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다.

 

 이 영화의 약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 인물들의 전형성이다. 실화에 근거하긴 했지만 이 역시 이야기인 관계로 10여명의 주요 인물들을 서로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때문에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 때론 무리한 전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10여일 간 한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2시간이란 분량으로 압축시켜 전개하고자 할 때, 그것도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키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불가피함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 나아가 그들이 보여준 행위들이 설사 소영웅적이거나 영화적으로 보여졌다 하더라도 그들이 보여준 행위들은 그 시간 그 광주에서 실제 있었던 사실이라는 점이다. 수십만 광주 시민들의 행위를 사건 전개를 위해 몇몇의 인물들에게 집중했고 그 결과가 전형성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많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응원하고 싶은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의 비극을 이들의 시선에서 보고자 했다는 점이다.

 

 언젠가 스페인내전을 다룬 영화인 <랜드 앤 프리덤>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실화를 다룬 작품, 그것도 비극적 실화를 다룬 작품을 보는 것은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그것은 주인공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파국을 우리는 이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순간 뒤에 도래한 그 파국을 알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도 시종일관 그러한 안타까움 속에 영화를 보았다. 그것이 내가 이 영화에 몰입하게 된 결정적 이유인지도 모른다.

 

 해방 광주의 시간.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물러나고 시민군에 의해 자치가 이루어지던 그 며칠간의 시간을 이 영화는 종종 익살적으로 표현한다. ‘해방이라 말했지만, 영화 속 시민군 대장의 말처럼 그것은 고립이었고 유예된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발하는 익살들은 내게 짙은 페이소스를 던져주었다. 그들의 종말을 나는 인지하고 있으며, 실제 살아 숨쉬던 그들 역시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기 대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웃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강인함이다. 그들을 웃을 수 있는 사람으로 표현해 준 감독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영화 속 여주인공 신애의 말처럼,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이 영화가 기억하고 있고, 이들의 싸움을 이 영화가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난 이 영화를 지지한다. 난 이 영화가 더욱 더 화제가 되고 논란이 되었으면 좋겠다. 피해자들에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가장 억울한 것은 그 억울함조차 잊혀지는 것일 테니까. 가해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기억하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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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s / Beck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인용된 니체의 격언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많은 부분 서로 소통하고 있으며, 또 많은 부분 소통하지 못하는 평범한 연인들이다.
  사귄지 2년이 지나 처음 만남의 설레임도 사라지고, 이젠 너무나 잘 아는 서로의 단점에 지치기도 한다.그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다투고 화해하는, 다른 많은 연인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 연인에겐 한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그건 이 연인들의 세계에는 선택된 기억만을 지워주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자친구가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데 격분하여 자신도 여자친구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 조엘은 망각의 여행을 떠난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선 그와 관련된 기억을 다시 꺼내야만 한다. 우리(관객)는 조엘과 함께 그들이 헤어지는 순간부터 처음 만나는 순간까지 그들의 연애를 역순으로 탐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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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사랑과 기억과 망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누구나 지나간 기억들로 힘에 겨울 때, 그 기억을 지우고자하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욕망이 실재화 됐을 때, '과연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대답은 각자의 몫일 테지만, 난 조엘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였으며, 조엘과 마찬가지로 아파했다.

  기억이 나지않는다면 슬퍼할 일도 없을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날씨가 춥다해서 걱정할 필요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아쉬워 할 일도, 종로거리를 걸으면서 순간순간 상념에 잠기는 일도, 때때로 혼자임을 생각하며 지독히 외로워 할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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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빙판길을 볼때면, 잘 넘어지곤 했던 그애 생각을 하며 미소짓는 순간도, 전재산을 털어 산 김밥 두줄에 행복했던 순간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행복했던 그 순간들도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픈 기억들과 함께 그 좋았던 모든 순간들에 대한 기억들 역시 사라지는 것이다. 나와 함께 시공간을 공유했던 한 존재의 소멸이란, 동시에 나의 소멸인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소멸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 '후르츠 바스켓'에도 망각과 관련된 에피소드 들이 있다. 이 애니에는 기억을 소멸시키는 능력을 지닌 캐릭터가 이 일을 수행한다.
  저주(이성이 안으면 동물로 변하는)받은 아이인 '모미지'는 자신을 거부하고 자신을 잊은 어머니를 멀리서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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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난 생각해.
    난 꼭 그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싶다고...
    설령 그것이 슬픈 추억일지라도
    날 아프게 할 뿐인 추억일지라도.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는 추억일지라도.
    잊지않고 간직한 채 도망치지 않고 노력하면...
    언젠가, 언젠가는,
    그런 추억에 지지않는 내가 될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렇게 믿고싶으니까.  
    잊어도 되는 추억같은건 하나도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난 이렇게 생각해.
    난 끝까지 추억으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다고...
    그래서 사실은 엄마도 잊지 않기를 바랬어.
    사실은. 노력해주길바랬어.  
    하지만 이건 내 욕심일 뿐이니까... 비밀이야"

"저도 ..      
저도 믿고있어요..      
어떤 추억이라도, 끝까지 이 가슴에 안고서..      
믿으며 살아가고 싶어요..      
잊어도 좋은 추억같은건..      
하나도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언젠가, 언젠가 지지않는 내가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가, 그것마저도 극복해서.      
소중한 기억이 될 수 있도록..      
  믿어요.."  
 

 -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 15화  '모미지'와 '토오루'의 대화

  망각이 축복이라는 건, 그것을 모두 잊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새 그 상처를 껴안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잊어도 되는 추억은 없는 것이고, 언젠가 모두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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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터널 선샤인'은 아픈 기억을 잊는다 해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님을, 또한 먹고 마시고 다투고 화해하는 소소한 일상의 기억들이 아주 소중한 추억임을 말해준다.
  감탄사가 나오는 '찰리 카우프만'의 놀라운 시나리오와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그리고 조연으로 나온 '커스틴 던스트'의 뛰어난 연기. 거기에 잘 녹아든 엔딩테마까지 올해 건진 영화 중의 하나다.

  그러나 아직 봉인되지 않은 기억의 잔상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아주 잔인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ps> 부작용이 생겼다. '봄날은 간다' 와 비슷한 증상인데, 기껏 갈무리해 둔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다. 오늘밤은 잠자기 힘들겠다. ^^

ps2> 이 영화 제목인 '이터널 선샤인'은 영화에도 인용된 알렉산더 포프가 쓴 <Eloisa to Abelard> 라는 시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아래는 그 시의 일부다.

- 출처 : 깨어있을때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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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200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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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디지털대학교' 인연으로 인해 '서울발레시어터'의 공연 '백설공주'를 관람하다. 발레를 공연장에서 본 것은 지난 '천원의 행복'에 이어 두 번째로, 옴니버스 형식이 아닌 하나의 극으로서 관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엄밀히 말해 난 발레에 관한 한 문외한에 가깝다.
 (이 글은 레포트 용으로 좀 길게 나열한 글을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만 추린거다.)

 금번 ‘백설공주’ 공연은 국립극장 주관으로 진행 된 ‘청소년 공연예술제’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공연을 이끌어가는 ‘서울발레시어터’ 역시 이 공연을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가족 발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공연의 주요 관람대상은 청소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청소년 관객들이 관객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실지로는 청소년이라기보다 초등학생 이하의 관객들이 더 많았던 듯 하다.)

 발레는 몸으로써 표현을 하는 예술이다. 보는이들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분노, 떨림, 기쁨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은 성공이라 생각한다. (감정과 함께 보는이에게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한다면 더욱.)
 공연을 통해 그런 부분들이 내겐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부분들이 과연 이 공연의 주된 관람 층인 청소년(혹은 아동) 들에게도 적확하게 전달이 됐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이 공연의 주제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때문에 무용수들이 보이는 행위들에 대한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다. ‘누가’ 등장했으며, ‘어디서’ 사건이 벌어지고,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모두 알고 있기에 그들의 몸짓에 반응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지식 때문에 난장이가 누구인지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공연을 보는 아이들(10세 내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졌다. 그 아이들에게 저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 단지 이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 이쁘고 어려운 몸짓을 하는 것으로만 비춰지진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인식된다 해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주제의 전달에 앞서 이미지와 그 몸짓들이 아이들에게 아름답고 즐겁게 인식된다면, 그것이 예술의 시발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때문에 1막의 마지막에 날리던 종이비행기가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한 즐거움이 보다 친근하고 가깝게 예술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공연을 보면서 동화의 윤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원작과 같이 이 공연 속 주인공인 ‘백설공주’ 역시 한없이 수동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바로 ‘왕비’다. (어쩌면 모든 악역은 적극적인 인물인지도 모른다.) 또한 고전의 재해석이라 했지만, 이 공연 역시 마지막에 왕자가 등장하고, 공주와 결혼하고, “그들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을 맺는다.
 따지고 보면 ‘백설공주’는 속된 말로 ‘인생 한방’의 전형 격이라 할 수 있다. 도망치고 숨다가, 유혹을 이기지 못해 위기에 빠지고 결국 왕자의 손에 의해 구원 받는 이 캐릭터가 과연 긍정적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 봤다.

 그러나 함께 본 친구와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다 과연 우리가 어릴 때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질문 해 봤다. 그저 마술이 나오고, 난장이가 나오고, 이쁘고 멋있는 공주와 왕자가 나오기에 좋았을 뿐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 공연을 본 아이들도 무대 속의 아름다운 몸짓과 종이비행기의 재미를 기억했으면 한다. 그 기억들이 보다 다양하고 값진 예술 체험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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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애초에 우리더러 딸기크림처럼 보드라운 마더 구즈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꿈꾸라고 했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 나이가 들면 결국 지긋지긋한 생활의 부담 속에서 사회적 개인의 자의식이 생길 테고, 동화적 환상 따위는 끝내 삶의 쳇바퀴 아래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리고 말 뿐인 것을.
 => 실비아 플라스 저,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中

 여자라면 누구나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그런 예쁜 동화를 동경하는 법이라구.
 그게 어디서 톱니바퀴가 어긋나 버렸는지,
 백조를 동경했는데 눈을 떠보니 시커먼 까마귀가 되어버린거지...
 단 한번의,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동화라면... 너무 잔혹하군
 =>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中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느낀 감정은 가슴이 너무 아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감정이었다. 그 먹먹함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몰랐다.

 영화는 이기적이지도 똑똑하지도 못했으며, 단지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인 한 여자의 잔인한 인생을 경쾌한 뮤지컬 형식으로 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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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약한 동생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마츠코가 아버지가 웃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반복해서 지어보이는 우스꽝스런 표정은 마치 피에로의 눈물 같은 효과를 준다. 곤란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마츠코의 저 표정은 웃음과 함께 짙은 페이소스를 주는 것이다.

 제자의 도둑질을 비호하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동거인에게 구타당하고, 몸을 팔다 살인를 해 감옥에 들어가고, 출소 후 야쿠자가 된  옛 제자와 함께 살고, 번번히 남자들에게 배신당하지만 그 남자들을 사랑하는 마츠코의 인생은 누가 뭐라해도 지옥같은 인생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지옥 같은 그녀의 인생을 너무도 웃기게 표현한다. 그 아이러니 때문에 그녀의 인생에 깊이 공감하게 된 지도 모른다.

 그녀의 첫 동거인은 자신을 '다자이 오사무'이 환생이라 믿었던 작가였다.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실격>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던 한 사내의 인생에 대한 소설이다. 그녀의 첫 동거인은 '다자이 오사무'를 따라, "태어나서 죄송해요" 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자살을 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된 그녀 역시 집 벽에 그 글귀를 새긴다. "태어나서 죄송해요"  <인간실격>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그저 받아들이고 무조건 적인 사랑을 준다.

인간의 가치는 말야
다른 사람에게 뭘 받았는지로 정해지는 게 아니야...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에게 뭘 줬는지로 정해지는 거야...

 그녀의 인생을 관객과 함께 알아가는 그녀의 조카 '쇼'는 여자친구로 부터 위 말을 듣는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마츠코 고모는 하나님이라고, 류 상은 말했다
마지막까지 끝끝내 구제불능에 끝끝내 불행했던 이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나는 신 같은건 잘 모른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혹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있어서,
그 분이 고모처럼 사람에게 웃음을 주고,
사람에게 힘을 주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지만 자신은 늘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지고
고독하고, 패션도 너무나 촌스럽고
그런... 철저하게 바보스러운 사람이라면
나는 그 하나님을...
믿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영화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생각나면 눈시울이 젖어든다. 이 영화는 냉정한 세상에 대한 잔혹한 동화다. 세상을 잘 살 수 없었던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 그들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참 좋은 영화다! 필견!! 2007년 최고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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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땐 누구나 자기 미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 생각대로 되는 일 따윈 하나도 없고, 괴롭고, 한심해지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中

원문 : 200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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