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긴 5일간의 연휴를 마치고 출근한 첫날은 왠지모를 피곤함이 가득했던 하루였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유로 가득찬 타당한 억울함 같은 것들을 지니고 살아간다고 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억울함을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해결 할 수 없는 상황일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별다를 것 없이 지나가던 연휴의 마지막 날, 아는 동생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유난히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올해 두번째로 찾아간 세브란스 영안실이었다. 동생에게 짧은 위로를 남기고, 함께 간 사람들과 작은 술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다른 동생의 실패한 자살 경험담을 듣고 가출 경험 혹은 가출 충동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지인들이 한번 쯤 가졌던 자살 충동과 가출 경험 그리고 자살 시도 등은 내게 그리 낯선 이야기들이 아니다. 내가 접하는 사람들이 감수성이 예민해서인지, 아니면 그들 각자가 처한 삶이 그들에게 강제한 것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 이야기들을 접할때마다 어떤 안타까움과 미안한 감정들이 생기곤 하는 것이다.

  지금 읽고있는 <88만원세대>라는 책은 지금의 20대를 88만원 세대라 정의하고 있다. 88만원은 비정규직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한 금액이라고 한다. 저자는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대다수의 20대들은 비정규직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으며 그 미래는 암울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저자들은 지금의 20대들이 높은 취업난에 자기 세대들끼리 죽고 죽이는 '배틀로얄'의 삶을 강제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위에 3~40대 들의 착취구조가 있다고 지적한다.
 선동열 방어율의 학점으로도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던 3~40대들이, 후배들에게 토익과 높은 학점에 자격증을 제시하는 한편, 지금의 20대들이 생각이 없다면서 비난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비판한다.

 88만원의 2배를 넘는 급여를 받고 정규직 생활을 하고있는 나는 이 '배틀로얄'에서 상위 구조에 진입한 것일까? 그럼에도 이 허한 감정들은 무어란 말인가?

 자신이 바라는 바를 꿈꾸고, 꿈꾸는 바를 위해 행동하고, 행동함으로서 꿈에 다가가는 것이 왜 어려운 것일까? 행동하는 것이 옳고 그것이 내게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란 것을 알고있지만,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란 존재가 또 그 행동을 막고 있다.
 내가 선택한 '틀 안에서의 최선'이란 어쩌면 일종의 '정신승리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결국 변화하지않는 내 자신에게 거는 자기최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안에 자리한 이 답답함, 그리고 이 열망들과 안타까움들이 아직 내 안에 있는 한, 난 아직 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조금 다른 어른이 되기 위한 길이 있다고 난 믿는다.
  <88만원세대>의 부제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인 것처럼...

 자살에 실패했던 동생의 말처럼 쉽게 죽지도 못하는 삶이라면 어쨌든 살아보는 것 밖에 없으리라. 오늘은 우울하지만 내일도 우울하리란 법은 없듯이... 다만 난 믿을 수 밖에 없다.

 오늘의 우울한 나를, 우울한 나의 88만원 친구들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꼭 끌어안아주고 싶은 밤이다.




 <초속 5센티미터>를 두번째 보다.

 영화를 두번이나 보면서 머리 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막상 활자가 되어 나오지를 않는다. 이것도 병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난 이 영화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짧게 평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 그 설레임과 두려움에 대한 감정, 좋아하기에 상처받고 좋아하기에 상처주고, 그 뒤에 남는 그리움과 미련 그리고 쓸쓸함에 관한 이야기.

 처음 사랑에서 '영원'을 느꼈다던 주인공은 결국 그 영원 때문에 다음 사랑에서 만족을 못 느꼈는지 모른다. 남자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이야기는 여자 역시 '영원'의 감정을 느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항상 상호적이지만은 않은 법이니까...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내 머리 속을 맴도는 잔상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이 영화를 두번째 본 시점에서 느낀 점은 앞서 느꼈던 그 좋아한다는 감정이 실은 '인연'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전적으로 요즘 읽고있는 <장정일의 독서일기 7>에서 장정일이 인용한 '피천득'선생의 "인연"에 대한 글 때문이다.

 저자(피천득)는 표제작이 된 작품(인연因緣)에서 '마음에 그리움이 남아있는 상태'를 인연이라고 규정하는 듯하다.
                                                      <중략>
 아사코를 사랑했던 피천득 선생이나 중국 유학생을 사랑했던 주요섭의 예에서 보듯이. 인연은 혼자 만들 수 없다. '나와 너의 만남'이 모든 인연의 시작이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비극적인 인연은, 인연의 불가능 속에서 홀로 된 자신과 대면한다. 너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씨앗이 되고, 불가능성이 거름이 되어, 이윽고 너와 나를 다시 태어날 내생來生의 환희 속으로 밀어내는게 인연이다. 아예 연을 맺지 말라는 불가의 가르침도 있지만, 인연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한편, 또 다른 약속으로 이끈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7> p 231~232 中

 '사랑'을 '인연'으로 그리고 그 '인연'을 '마음에 그리움이 남아있는 상태'로 이해하면 영화 속 남자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그 미소 또한 이해할 수 있게된다. 그는 위의 글에서 장정일이 말한 바와 같이 그제서야 홀로 된 자신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다른 인연을 맺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그의 삶 속에서 쓸쓸함이 좀 다른 의미가 되었을거라고 ,그리고 그 결론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음에 그리움이 남아있는 상태' 정말 명료한 정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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